여우가 되어가는 남편
일요일 아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난주에도 주말에 비가 내리더니 이번 주도 …
자기야가 드라이브겸 단풍구경 가잔다
나 : 비 오는데 ?
자기야 : 그칠 거야 오늘은 비가 안 온가고 했거든
월요일부터 비 온대
나 : 일기예보가 믿을 수가 있어야지..
보슬보슬 내리는 게 비가 많이 올 것 같진 않지만 구름이 잔뜩 낀 게 날이 좋아질 것도 같지 않았지만 집에 있어봐야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하루 종일 이불속에서 뒹굴기만 할게 뻔하니까 일단 나가 보기로 했다
히로는 오늘도 친구들을 만난다며 가족과의 외출을 거부했다
이젠 아들 녀석과 외출 한번 하기가 어렵다
일치감치 예약을 잡아야만 가능해진 아들과의 외출!
바쁘긴 지가 제일 바쁘다
워낙 친구가 많고 또 친구를 좋아하는 아이라 친구가 제일 1순위다
이건 100% 시아버지 빼박이다
밖에선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셨던 시아버지
집에선 (가족에겐) 단연 인기가 없었던 시아버지 빼박이다
신혼 때는 자기야 와의 둘만의 세상이었다가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 중심의 생활이 되었다가
이제 아이가 크고 나니 다시 둘만 덩그러니 남아지는 것 같다
아이를 키울 땐 사소한 말다툼을 비롯해 부부싸움의 95%는 히로 때문이었던 것 같다
육아에 대한 의견 차이부터 아이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나 고민을 받아들이는 입장 차이가 있을 때
토닥토닥 말다툼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이 부분이 문제가 생각 하지만 자기야는 그게 왜 문제냐 라며 이해를 못 하고 나는 애들이 다 그렇지 하는 부분을 자기야는 그건 아니지 … 뭐 그런 아주 사소한 일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녀의 생각 차이일수도 있겠지만 나와 자기야의 가치관의 차이였던 것 같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이 다르니 의견 차이가 있는 게 당연한데 그걸 이해 시키려 하고 내 감정에 동조해 주길 바라니 다툼이 생길 수밖에 …
이렇게 나열하다 보니 히로를 키우며 엄청 무지 싸웠나 보다 하실 것 같지만 그건 아니다
자기야 랑 20년 넘게 살아오면서 크게 싸운 적은 없는데 토닥토닥 다퉜던 대부분이 히로를 키우며 생기는 말 그대로 히로 때문이었다 뭐 그런 …. ㅎㅎㅎ
히로가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면서 껌딱지 같이 붙어 다니던 히로를 떼 놓고 다니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떼 놓고 다녔다기 보단 그때부터 히로가 엄마 아빠보다 친구가 더 좋았던 것 같다
진학 고였지만 성적보다 학창 시절을 더 즐겼던 히로였다. 공부 때문이 아니라 부카츠(특별활동)와 학교 문화제며 체육대회 각종 학교 행사에 임원을 하느라 늘 바빴고 그렇게 학창 생활을 맘껏 즐겼었다
오죽했으면 같은 학년 360명 중에 히로를 모르면 간첩이라 했을까
덕분에 친구들은 소위 명문 대란 곳에 대부분 진학을 했고 히로가 친구들 중엔 제일 못한 곳에 중상위권에 진학을 해서 엄마로서는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였지만 그래서 고교 시절 히로가 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하세요 라며 자유롭게 키운 게 후회한다고 좀 더 성적에 신경 썼어야 했다고 했더니 히로는
“자기 인생에서 제일 즐거웠던 고교시절이었다며 자기는 후회는 눈곱만큼도 없다며 너무나 만족스럽다 “
라며 한치의 후회도 없다며 너무 당당하다
행복이 성적 순이냐 아니냐 … 글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아들은 지금도 고교 시절 3년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만족스러운 인생이었다고 한다
그래 니가 행복했다면 그럼 된 거지..
그래서일까
지금도 히로 주변에는 친구들이 많다
여전히 고교 때 친구들 남사친 여사친 구분 없이 대학교는 다르지만 여전히 좋은 친구다
그런 친구가 한둘이 아니니 히로와의 가족 나들이는 선예약 없이는 참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라고 나이가 들면 부부가 젊었을 때보다 더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 것 같다
아이가 엄마 아빠보다 친구가 더 좋다며 돌아다니는데 덩그러니 남아진 부부가 대면대면하다면 얼마나 외로울까 …
게다가 난 외국에서 사는데 말이다
다행히도 우리 집 자기야 와는 아직도 여전히 사이가 좋다
주말이면 자꾸 밖으로 나가자 해서 귀찮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자기야가 나가자 하면 난 두말없이 따라나선다
한번 두번 내가 귀찮다며 피곤하다며 거절을 하다 보면
나중엔 마누라가 피곤하다…. 라며 지레짐작하고 나가자 소리 하지 않을까 봐 자기 혼자서 놀러 다닐까 봐
자기야가 나가자면 무조건 따라나선다
어차피 운전은 자기야가 하고 난 피곤하면 조수석에 얌전히 앉아 꾸벅꾸벅 졸면 되니까 피곤하다는 건 핑계일 뿐이다 준비하고 나서는 게 귀찮은 거다
귀찮다 피곤하다 하면서도 막상 나오면 이렇게 좋은데
도착하고 보면 역시 나오길 잘했다 싶은데 …
아침에 보슬보슬 내리던 비가 자기야 말 대로 도착하자마자 뚝 하니 그쳤다
좋다 …
나오길 잘했다
사진을 마구 마구 찍어 아들 녀석 라인으로 보냈다
친구들과 노느라 너무나 즐거운 히로가 “ 좋네.. 나도 엄마 아빠 따라 단풍 구경 갔었으면 좋았을걸..”. 요런 후회는 절대로 안 할 거란 걸 알지만 너 없어도 엄마 아빠 재미있게 잘 놀고 있다
너 보다 내가 더 재미있다
이런 걸 어필하고 싶은
유치한 마음에 …
글쎄… 나와 자기야의 가치관의 차이인지 아님 남녀의 생각 차이인지 난 좋은 걸 보면 자기야 랑 히로 생각나고
맛난 거 먹으면 자기야가 히로에게도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나는데 우리 집 자기야는 아닌 것 같다
단풍을 보며 사진을 찍어 히로에게 보내는 나 와는 달리 그냥 즐긴다
나도 자기야처럼 그래야지 생각은 하면서도 여전히 좋은 걸 보면 히로에게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젠 나도 달라져야지 생각 중이다
이제 히로는 몇 달 후면 스무 살 성인이 되는데 이젠 내 아들이 아닌 한 남자 히로로 생각을 바꿀려고 하고 있다
스무살 성인까지는 부모인 내 책임이지만 성인이 되면 본인 스스로 자기 인생을 살아가게 …
솔직히 말하면 히로는
벌써부터 정신적인 독립을 했다
내가 아직 히로는 미성년이니까 라며 히로를 독립시키지 못했을 뿐
이젠 딱 넉 달 남았다
넉 달 후 성인이 된 히로를 완전히 독립시키고
중년 아줌마의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지…
젊었을 때 부부가 사이가 좋은 건 당연한 거고
나이가 들어가며 중년 그리고 노년에 사이가 좋은 부부를 보면 참 보기가 좋다
그래서 나의 목표는 나이가 들어 머리가 새하얗게 되었을 때도 손을 잡고 가을 단풍을 보러 다니는 노부부의 모습이다
가끔 가려운 등도 긁어 주면서 ㅋㅋ
아니
그런데 우리 집 자기야는 이쁜 마누라 사진은 안 찍어 주고 단풍 사진만 찍고 있다
나 : 자기야 내가 이뻐 단풍이 이뻐? 왜 네 사진은 안 찍어 주고 단풍 사진만 찍어?
자기야 : ….
거짓말 못하는 이 남자 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답이 금방 나오지 못한다
나 : 거짓말이라도 내가 이쁘다고 해야지
자기야 : 아니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까 그렇지
단풍을 어떻게 자기랑 비교해 ㅎㅎ
이 남자 많이 아주 아주 많이 늘었다
예전엔 농담이라곤 전혀 못 했는데 이젠 아주 아주 능청스러워졌다
아니 어떨게 저렇게 받아치지?
예전에 자기야였다면 상상을 할 수 없는 모습이다
변했어 진짜 변했어
여자가 여우라더니 나이가 드니 남자도 여우가 되네
내 남자는 여우! 인정!
빨갛게 물든 단풍보다 더 이쁜 마누라랑 여우 같은 내 남자랑 걷는 가을 호수길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매일 오늘 같이만 좋아라 ㅎㅎ
오늘도 난 생각한다
역시 나오길 잘했어 …